헨델이 눈물로 작곡한 <메시야>는 하나님의 광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메시야>에는 헨델이 체험한 십자가의 사랑 때문인지 사람들의 영혼을 흔드는 영감이 서려 있다.
그 작품이 런던에서 공연될 때 영국 국왕 조지 2세가 나무나 감동되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모든 관객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그후에도 <메시야>의 할렐루야를 연주할 때면 관객들이 일어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그것이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한 작품의 영향력이다. 그처럼 왕의 마음까지 움직여서 벌떡 일어서게 하는 감동적인 작품이 또 어디 있을까?
십자가의 사랑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메시야에 담긴 사랑의 힘은 그것만이 아니다. 헨델이 처음으로 <메시야>를 공연한 것은 1741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이었다. 첫 연주회 때부터 그 이익금 중 일부가 자선 사업을 위해 기부되었다.
그후에도 헨델은 고아들의 병원을 건립하기 위해 10여차례나 직접 지휘하면서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려고 했다. 당시 영국의 시골에는 어린이들이 학교에 갈 수 없을만큼 가난에 허덕였다.
런던의 거리에는 고아들이 내버려지는 것은 보통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헨델이 고아들을 위한 병원 건립을 위해 자선 공연을 10여차례씩이나 가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욱이 헨델은 그런 공연을 통해서 자신의 가난을 벗어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쌍한 고아들을 먼저 생각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다.
십자가의 사랑을 전해야 할 세상이 어떤 곳인가? 성경에는 ‘세상’이란 말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언급한다. 어떤 곳에서는 죄로 오염된 세상을 말한다. 그렇다! 세상은 죄로 가득하다. 세상도 그렇고 세상 사람도 죄 가운데서 살아간다. 요한은 아주 강한 어조로 그런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요일2:15).
이 말씀에서 원문에는 ‘말라’ 는 말을 강조해서 앞에다 두었다. 아주 강한 부정인 셈이다.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는 말이다. 다른 곳에서는 ‘세상’을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들을 지칭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 ‘세상’의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다(요일2:15-17).
또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대상으로써의 ‘세상’의 의미로 쓰여질 때도 있다. 그때의 ‘세상’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 동산을 의미한다. 그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다.
그 세상은 장차 영원한 나라가 세워질 처소이며, 영광스럽게 변형될 천국의 묘형이기도 하다. 요한이 복음서에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한 세상이 바로 이 세상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우리가 십자가의 사랑을 확산시켜야 할 영역은 바로 이 “세상”이다. 주님이 우리 죄 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해서 오셨기 때문이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2:2).
그렇다! 이제 십자가의 사랑이 온 세상에 흘러 넘쳐야 한다. 사랑의 파도를 온누리에 일으켜야 한다. 그것이 십자가를 계획하신 하나님의 목적이다.
송삼용 목사/ 하늘양식교회, 크리스천포커스 발행인
이승재 기자 scanman7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