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즐겨찾기추가  
  편집 07.01 (금) 11 : 58 전체뉴스 6,839
 로그인
회원가입  마이페이지  고객센터  기사제보  장바구니  주문조회
전체보기
logo
뉴스 함께하는교회 신학포커스 특집기획 CFC TV 포토뉴스 커뮤니티 쇼핑몰
> 신학포커스 > 개혁신학
크게보기작게보기프린트메일보내기스크랩
[특별기고] 박종만목사, 종교개혁의 중심 사상(1)
트위터페이스북카카오톡카카오스토리밴드 네이버블로그
본 특별기고문은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설교집, "오직 복음, 개혁을 외치다"에 수록된 <종교개혁의 중심사상>으로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 저자 제공으로 크리스천포커스에서 [특별기고] 타이틀로 세차례 나눠 보도
2017.12.11 22:00 입력

  

   

본 기고문은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설교집, "오직 복음, 개혁을 외치다"에 수록된 글로 박종만 목사(보문교회)의 <종교개혁의 중심사상>을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 저자 제공으로 크리스천포커스에서 [특별기고] 타이틀로 세차례 나눠 보도한다.  - 편집자 주 -

 

종교개혁의 시작

 

종교개혁(宗敎改革, Protestant Reformation)은 1517년 마틴 루터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는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부패한 교회를 새롭게 변혁시키고자 했던 신학운동이다. 

 

로마가톨릭 사제였던 마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회 정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였다. 그리고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루터의 반박문을 증명하는 유일한 문서인 요하네스 슈나이더(Johannes Schneider)의 육필원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1517년 루터는 엘베 강변 비텐베르크에서 대학의 오랜 관습에 따라 모종의 명제를 논쟁용으로 제출했다. 그러나 너무나 조심스러운 형태라서 누군가를 비방·중상할 의도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따르면 종교개혁은 가톨릭에 대하여 급진적으로 도전한 것이 아니라 조심스러운 형태로 촉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개혁의 불길은 타올랐고 유례없는 변혁이 시작되었다. 신앙의 본질을 되찾으려는 열정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종교개혁 운동의 결과 종교개혁 이전의 칼케돈파인 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 비 칼케돈파인 오리엔트 정교회와 신교 혹은 개신교로 불리는 장로교, 개혁교회, 루터교, 침례교, 성공회 등의 교파로 분리되었다. 

 

종교개혁은 존 칼빈에 의해 신학적으로 완성되어, 제네바를 중심해서 전 유럽으로 그리고 세계로 뻗어나갔다.

 

존 칼빈의 종교개혁(John Calvin, 1509-1564)

 

독일에서 루터를 중심으로 개혁운동이 일어남과 더불어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에 의해 프로테스탄트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가운데 제네바에서는 칼빈의 신앙운동이 꽃을 피웠다. 

 

이후 칼빈의 제자였던 존 녹스는 스코틀랜드로 가서 개혁교회 (Reformed Church)신학을 전함으로써 스코틀랜드에 장로회 전통을 확고하게 하였다.

 

1537년 1월에 칼빈은 제네바의 대 의회 앞에서 자신의 개혁안이 담긴 비망록을 전달하였다. 성만찬, 공중 예배에서의 찬양, 어린이의 종교교육, 결혼 등 네 가지였다. 

 

성만찬은 가급적 자주 집행하는 것이 좋으나 현재의 형편으로는 한 달에 한 번씩 행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불합당한 자는 주님의 몸을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출교에 관한 치리를 제정해서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회중에게는 시편찬송을 적극적으로 권장함과 동시에 가르치도록 하였고, 어린이들에게는 순수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간략한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을 작성해서 목회자가 직접 가르치도록 했다. 

 

결혼은 지금까지 악하고 비성경적인 교황청 법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새로운 규정을 제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칼빈의 새로운 제안은 교회의 행정에 관한 조항으로서 소 의회와 대 의회를 통과하였다. 성만찬은 일 년에 네 차례 집행하며, 결혼 광고는 예식 거행에 앞서서 3주 동안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제네바 시는 칼빈과 그의 동료 파렐의 가르침에 따라서 종교개혁을 추진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개혁에 찬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1538년 1월에 시의회는 원치 않는 사람에게는 성 만찬을 베풀지 않는다고 결정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른시의 간섭과 더불어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재세례파와 손을 잡았고 파렐과 칼빈을 아리우스주의자이며 자유방임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 

 

베른 의회는 제네바를 위시한 전 지역을 그들의 손에 넣으려고 하였다.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연약한 제네바 시의회는 3월에 이르러서 베른의 예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파렐, 칼빈은 제네바를 떠날 것을 명받았다.

 

파렐과 칼빈은 제네바를 떠났다. 칼빈은 허탈감에 빠져서 스트라스부르에서 연구에 전념하기로 하였다. 그간 파렐과 더불어서 3년 동안 개혁을 시도하였던 모든 일이 허사로 끝난 데 대한 분노와 갈등을 이겨내면서 연구와 함께 프랑스 난민들을 돌보는 등 목회 일에 전념하였다.

 

파렐과 칼빈이 떠난 제네바의 상황은 예전보다 좋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악화되었다. 특별평의원들은 새로 부임한 목회자를 자기의 종같이 부렸으며, 모든 가장들에게 교회에 참석토록 하는 의무규정을 부과하였다. 

 

주의 만찬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도시의 도덕적 수준은 날로 저하되어 갔다. 이렇게 해서 평의원들은 인기가 떨어져 다음해 선거에서 재당선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칼빈을 다시 초청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 되었고 1539년 10월 대 의회에서 대표자를 보내 뜻을 전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칼빈은 보름스 의회에 참석 중이었기 때문에 답장을 유보한 채 번민에 싸여 있었다. 이때 파렐의 충고가 칼빈에게 크게 작용하였다. 

 

파렐은 제네바가 차지하는 지역적인 중요성을 들어서 제네바가 개혁되면 인근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의 복음화가 가속화된다고 강력하게 설득하였다. 

 

결국 칼빈은 3년여 동안 제네바를 떠나 있다가 1541년 9월 13일 다시 제네바로 돌아왔다. 돌아온 그는 제네바 교회규범을 제정하여 의회에서 통과시켰고, 개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엄격한 훈련과 경건생활 실천을 위한 각종 제도의 수립과 이단을 색출해서 처리하는데 이르기까지 칼빈은 정열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소위 말하는 외국인이었다. 이런 그가 제네바에서 세력을 얻어 확장시키기까지의 과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었다. 다시 돌아온 칼빈과 시의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마찰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칼빈의 사상을 율법적인 독선이라고 비난하였다. 마치 루터에게 농민 전쟁이 예기치 않은 결과를 초래하였듯이 칼빈도 이들로 인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개혁은 철저하였다. 이단성이 있는 것은 정죄하였으며, 자유주의자들에 대하여서는 전통신앙과 신학을 고수함으로써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또한 신앙 본래의 모습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 중 성경적인 부분은 유지하였으나 성경에 위배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단호하게 개혁하였다. 미사를 폐지하여 성경적 예배로 바꾸었으며, 교계제도를 장로제도로 바꾸었다. 또한 인본주의적 공로사상과 우상 숭배적 관행을 개혁하였다(계속)

 

박종만 목사/ 보문교회, 종교개혁500주년기념사업위원 역임



이신덕 기자 i-cody7@hanmail.net
화제의 개혁신학포토
null
이전
주요 뉴스
개혁신학
종합
인기 뉴스
개혁신학
종합
  • 등록된 뉴스가 없습니다.
회사소개| 개인정보취급방침| 회원약관| 고객지원센터| 제휴 및 광고문의 |저작권안내 |기자회원신청 |기사제보 |정기구독신청 |다이렉트결제   탑 알에스에스
CFC TV
생명의 양식
Sermon Video
소강석 목사
새에덴교회
권순웅 목사
주다산교회
장봉생 목사
서대문교회
김종준 목사
꽃동산교회
이승희 목사
반야월교회
양대식 목사
진주성남교회
유장춘 목사
새소망교회
이기동 목사
새가나안교회
송삼용 목사
하늘양식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