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즐겨찾기추가  
  편집 07.01 (금) 11 : 58 전체뉴스 6,839
 로그인
회원가입  마이페이지  고객센터  기사제보  장바구니  주문조회
전체보기
logo
뉴스 함께하는교회 신학포커스 특집기획 CFC TV 포토뉴스 커뮤니티 쇼핑몰
> 신학포커스 > 개혁신학
크게보기작게보기프린트메일보내기스크랩
조지 휘트필드와 제2차 대각성 운동(2)
트위터페이스북카카오톡카카오스토리밴드 네이버블로그
사도 시대 이후 가장 탁월한 설교자로 평가받아온 조지 휘트필드, 30여년 동안 한 주일에 약 20 시간 혹은 40시간, 60시간씩 수천, 수만의 사람들에게 설교, 1년에 천번 정도의 설교로 평생 3, 4만번의 설교로 경이적인 기록 남겨
2015.12.24 09:46 입력 | 2016.02.29 02:55 수정

휘트필드1.jpg
조지 휘트필드는 1714년 12월 16일 영국 중부지방 글로스터(Gloucester)에서 태어났다. 휘트필드는 두 살 때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서 가정의 경제에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런 이유로 인하여 어려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그러다가 12살에 이르러서야 교회 부설의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15살 때에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어머니를 돕기 위해 약 1년 반 정도 학교를 중단하기도 했다. 

그 무렵에는 여인숙 급사로 일할 정도로 가정 형편이 극심하게 어려웠다. 더구나 4살 때에는 홍역을 앓다가 생긴 눈부위의 흉으로 인해 ‘사팔뜨기’ 라는 별명까지 갖게 되었으니 어린 시절 내내 무거운 짐을 안고 자란 셈이다.

하지만 휘트필드는 어려서부터 배워온 신앙의 힘으로 가정의 불운이나 신체의 결함을 잘 이겨냈다. 그 결과 열여덟살 때에는 옥스포드의 펨브로크 대학에 당당하게 입학했다. 

그는 대학 시절 내내 단 일분 일초도 낭비하거나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학업에 최선을 다했고, 영적 성장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함으로 누구보다도 성공적인 대학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수 천번을 눈물로 기도하며

휘트필드는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읽으면서 깊은 신앙을 체험했다. 옥스포드 시절에는 많은 신앙 고전들과 청교도 서적들도 독파해 나갔다. 특히 옥스퍼드에서 만난 홀리클럽 (The Holy Club) 회원들과의 교제는 영적 훈련에 많을 도움이 되었다. 

헨리 스쿠갈 (Henry Scougal)이 쓴 ‘인간의 영혼속에 거하신 하나님의 생명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 1677)’ 이라는 책은 휘트필드가 거듭남을 체험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휘트필드는 어려서부터 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자신이 목사가 되기에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대학을 마친 후 주변 사람들이 지속적인 권면과 조언을 듣고 수 천번이나 눈물로 기도했다. 목회자의 소명을 확인할 때까지!!! 결국 그는 하나님의 응답을 확인한 후에 성직자의 길을 결단하고 21세 때 안수를 받게 되었다.

휘트필드는 국교회의 직제에 의해서 먼저 집사(deacon)로 안수를 받은 후 공식 설교자로 사역했다. 그후 생을 마칠 때까지 능력과 권세있는 설교로 사역을 이끌었다. 휘트필드는 말씀의 불꽃으로 한 시대를 불태운 세기적인 설교자였다. 

잉글랜드와 웨일즈 그리고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휘트필드가 설교하러 온다는 소문만 퍼지면 수천, 수만명씩 모여 들었다. 당시에 모였던 최대의 인파는 8만명이나 되었으니 경이적이 일이었다.

그의 사역은 보통 사람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30여년 동안 한 주일에 약 20 시간 혹은 40시간, 60시간씩 수천, 수만의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1년에 천번 정도의 설교로 평생 3, 4만번의 설교를 했으며 공식적인 대중 집회를 1만 8천번이나 인도했다. 

하지만 휘트필드의 탁월한 설교와 엄청난 군중 동원의 위력은 당시 많은 성직자들에게 미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설교 사역을 시작한지 일년이 조금 지난 후부터 들판이나 산, 혹은 공공시설 등 야외의 어느 곳에서나 설교함으로써 야외 설교자의 선구자가 되었다.

휘트필드의 사역은 잉글란드와 웨일즈 그리고 스커틀란드에만 제한되지 않았다. 휘트필드 집회를 깃점으로 시작된 영적 부흥 운동은 미국의 대각성 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휘트필드가 아메리카에 처음 발을 딛은 때는 22살 때였다. 

당시 요한 웨슬리의 원조 요청으로 조지아주에 가서 영적 각성의 불을 붙였다. 후에 휘트필드는 집회 때마다 드려진 헌금으로 조지아주에 베데스다 고아원을 건축했다.

그후 휘트필드는 일곱 차례나 아메리카를 방문했다. 아메리카를 방문할 때마다 성령의 역사가 그치지 않았다. 부흥의 불길이 영국에서 아메리카까지 번져간 것이다. 영국의 집회처럼 휘트필드가 가는 곳마다 군중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그 무렵 미국에서는 길버트 테넌트, 조나단 에드워즈 등과 같은 위대한 사역자들이 대각성 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휘트필드의 강력한 설교는 아메리카에 영적 각성에 불이 타오르게 했다. 

휘트필드의 사상적 체계는 칼빈주의 사상으로 형성되었다. 그것은 18세기 영국 부흥 운동에 있어서 휘트필드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했던 요한 웨슬리와 극명하게 대조되었다. 

웨슬리는 알미니안 신학체계를 따름으로써 휘트필드와 결별하고 서로 다른 노선을 걸으며 부흥운동을 주도했다. 휘트필드는 군중의 주도권 문제로 웨슬리로부터 많은 상처와 아픔을 겪었지만 복음 외에 모든 것을 포기했다. 

야외 집회의 선구자로서 최기 웨슬리 집회의 조력자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군중의 주도권을 웨슬리에게로 넘겨 주었다.

심지어 자신에게 주어진 칼빈주의적 감리교협회의의 수장직까지 웨슬리에게 양보할 정도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을 중시했다. 그리스도의 이름보다 자신의 이름이 더 높아질 것을 우려하면서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휘트필드20.jpg
“휘트필드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하고, 모든 사람의 발길아래 짓밟히게 하라. 그렇게 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영화롭게 될 수 있다면. --- 내 이름은 모든 곳에서 없어지게 하고, 내 친구들에게서 조차도 나를 잊게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복되신 그리스도의 대의 (cause)가 증진될 수만 있다면."

뉴잉글랜드의 방문 집회

취트피드가 영국에서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고, 영국 국교회로부터 추방되어 야외 설교로 영국을 휩쓸었다. 그후 1737년 12월 30일 아메리카의 조지아행 윗태커(Whitaker) 호를 타고 뉴잉글랜드로 향했다. 

휘트필드를 태운 윗태커 (Whitaker) 호는 런던을 떠나 딜(Deal) 항에 정박하고 있다가 다음 해(1738) 2월 2일 조지아로 출항했다. 그는 배 안에서 의자 위에 두꺼운 판자를 깔고 강대상을 만들어서 매일 배 안에 있는 백여명 이상이나 되는 사람들을 향하여 설교했다.

한 때 배 안에는 모든 사람들이 유행성 열병으로 인하여 커다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 때 휘트필드는 밤 낮으로 환자들을 돌보다가 자신이 열병으로 눕게 되었다.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은 자기 몸을 돌아볼 겨를이 없게 만든 것이다. 

그 열병은 휘트필드를 죽음으로 몰아쳐 가는 듯했으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회복시켜 주셨다.

윗태커 (Whitaker) 호는 영국을 떠난 지 넉 달 만에 마침내 조지아 항에 닻을 내렸다. 식민 대륙에 상륙한 휘트필드는 다음 날 아침 다섯 시에 오십여명의 사람들과 함께 첫 예배를 드렸다. 그의 사역의 첫 시간을 예배로 시작한 것은 장래의 모든 사역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신앙적 결단이었다. 

식민 대륙의 사무관인 윌리엄 스티븐스 (William Stephens)는 다음과 같이 당시 휘트필드의 사역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5월 21일. 휘트필드씨는 이 날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했고, 그는 일찍이 그 곳에서 볼 수 없었던 가장 많이 모인 회중들에게 설교하였다. 5월 28일. 휘트필드씨는 그의 사역을 통하여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6월 4일. 휘트필드 씨의 청중의 수가 매일 불어난다. 그의 교리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을 수용하기에는 예배 장소가 너무 좁다. 6월 18일. 휘트필드 씨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강론으로 사람들을 계속 감동시켰다. ---

7월 2일. 휘트필드 씨는 그의 수고와 따뜻한 배려로서 직분을 이행하는 태도로서 사람들에게 점점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처럼 휘트필드가 지피운 복음의 불길은 선상에서 다시 조지아로 번져나가면서 날이 갈수록 점점 뜨겁게 타올랐다. 조지아에 붙여진 말씀의 불꽃은 이제 머지않아 아메리카에 비춰질 복음의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조지아에서의 사역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오갈데 없는 그 곳의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서 영국에 돌아가 고아원을 세울 수 있는 설립 허가서와 기금을 마련해 오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가슴을 소유한 휘트필드는 죽어가는 어린 영혼들을 그대로 방치해 둘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계획 때문에 휘트필드는 조지아에서의 사역을 다섯 달 만에 그치고 다시 영국행 배를 탔다. 
휘트필드 동상.jpg

2차 뉴잉글랜드 방문 집회

영국으로 돌아온 휘트필드는 엄청난 사역으로 영국 전역에 영적 불을 지피웠다. 최대 인파 8만명이 모여들 정도로 뜨거운 부흥이 일어났다. 

영국 브리스톨에서 웨슬리를 끌여들어 함께 대중 집회를 이끌었다. 그 다음 해(1739년 8월 14일) 다시 뉴잉글랜드로 향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며 그레이브젠드 (Gravesend) 항구에서 조지아로 출항했다. 

선상에서까지도 쉴 틈없이 복음 사역을 행한지 열 한 주간만인 1739년 10월 30일 아메리카의 루이스타운 (Lewistown)에 도착하였다.

아메리카에 도착한 휘트필드는 대륙의 중심지인 펜실바니아(Pennsylvania)로 갔다. 하지만 조지아에 고아원을 세우기 전에 먼저 아메리카에 대해 좀더 알려는 계획으로 그는 필라델피아(Philadelphia)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매일 저녁 야외에서 집회를 가졌다. 

놀랍게도 그곳에서도 영국에서와 같이 엄청나게 많은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휘트필드의 탁월한 설교의 능력이 소문나자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큰 교회가 그를 설교자로 초청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다시 야외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후로 필라델피아에 있는 교회들은 휘트필드가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을 거절하기 시작했다. 결국 휘트필드는 영국에서처럼 또 다시 야외 설교자로 나서야 했다. 야외설교 사역이 왕성하게 진행되는 동안에도 휘트필드는 조지아에 고아원을 세우는 일을 준비해 나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동역자인 윌리엄 슈어드(William Seward)와 비서인 죤 심스 (John Syms)를 데리고 조지아로 향했다. 휘트필드는 육로로 여행하면서 매일 만나는 무리들을 모아놓고 설교했다.

조지아에 도착한 휘트필드는 그곳 사람들로부터 수 십만평의 땅을 양도받아 고아원을 짓기 시작했다. 그 고아원의 이름은 ‘자비의 집’ (A House of Mercy) 이라는 의미가 있는 ‘베데스다’ 라고 지었다. 

하지만 휘트필드는 베데스다의 건물이 완공될 때까지 앉아서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그래서 휘트필드는 다시 복음 전도 여행을 준비해서 필라델피아로 향했다. 그때 필라델피아에 도착한 휘트필드는 그의 생애 동안 계속적인 우정을 나누었던 아메리카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벤쟈민 프랭크린 (Benjamin Franklin)을 만나게 되었다. 

수년 후에 플랭클린은 당시 휘트필드의 사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739년 우리들 가운데로 휘트필드 목사가 도착했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든 교파와 교단에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거기 모여든 사람의 숫자도 숫자이지만 그 웅변술로 청중들을 감화시키는 그의 탁월한 영향력은 정말 깊이 생각해 볼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주민들의 태도에 곧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 또한 놀라운 일이다. 별 생각도 없이 살고 종교에는 무관심하던 그들이 모두 점점 경건해지고 있으며 저녁 때 거리를 걷노라면 골목골목의 모든 가정마다 찬양의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다. ---”

휘트필드 21.jpg
한편 대각성 운동 외에 휘트필드가 아메리카에서 이룬 일들 가운데서 빼 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업적은 흑인 노예들을 위한 봉사였다. 그는 학문이 전혀없는 무식한 흑인들에게도 쉽게 설교함으로서 흑인들에게 영적인 진리를 전했으며, 노예들에게는 물질적인 도움을 주려고 애썼다. 

그래서 휘트필드는 델라웨어 (Delaware) 근처에 땅을 사서 그곳에 불쌍한 노예들을 교육하는 곳으로 쓰일 건물을 지어 흑인들을 도우려고 했다. 휘트필드는 그건물의 이름을 ‘나사렛’ 이라고 붙이고 공사를 진행시켰다. 

하지만 그 일은 주변 인디안들의 계속된 공격과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인해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계속>

송삼용 목사/ 하늘양식교회, 개혁주의 영성아카데미 원장


김광근 기자 cfocusk@hanmail.net
화제의 개혁신학포토
null
이전
주요 뉴스
개혁신학
종합
인기 뉴스
개혁신학
종합
  • 등록된 뉴스가 없습니다.
회사소개| 개인정보취급방침| 회원약관| 고객지원센터| 제휴 및 광고문의 |저작권안내 |기자회원신청 |기사제보 |정기구독신청 |다이렉트결제   탑 알에스에스
CFC TV
생명의 양식
Sermon Video
소강석 목사
새에덴교회
권순웅 목사
주다산교회
장봉생 목사
서대문교회
김종준 목사
꽃동산교회
이승희 목사
반야월교회
양대식 목사
진주성남교회
유장춘 목사
새소망교회
이기동 목사
새가나안교회
송삼용 목사
하늘양식교회